무궁화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동진(東晉)의 문인 곽복(276~324)이 쓴 지리서 <산해경(山海經)> 이 있다. 그리고<조대기> <단군세기(5대단군 구을이 무궁화를 심은 기록도있다)> <규원사화>등 많은 문헌에도 나오고 또한 “군자의 나라” 무궁화가 많은데다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지더라(君子之國有薰華草朝生暮死)라는 기록이 있다.
또 중국의 고전인 <고금기(古今記)>에는 “군자의 나라에는 지방이 천리인데 무궁화가 많이 피었더라”(君子之國地方千里多木槿花)라는 기록도 있다.
4세기 중엽의 대한민국에는 가는 곳마다 무궁화가 만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무궁화가 한국 자생인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최치원이 당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신라를 근화향<槿花鄕:무궁화의 나라>이라 하였고, <구당서>에도 같은 기록이 있다. 강희안의 <양화소록>에 중국에서 한국을 근역(槿域)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 예종(睿宗)은 고려를 근화향(槿花鄕)이라고 하였다. 무궁화는 주로 자가불화합성 식물이므로 오랫동안 수많은 잡종이 생겼을 것이고 또 변이에 의한 품종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나 오늘날 재래종으로서 볼만한 것이 드물다.
이러한 현상이 된 것은 외환이 여러 차례 있었던 것과 한국인들이 정원 꾸미는 것을 전통적으로 지나친 사치로 생각해 왔던 까닭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일제강점기에 무궁화가 한국 민족의 상징적인 꽃이라는 것을 알고 전국적으로 뽑아 불태워 없애버림으로써 큰 수난을 겪었기 때문이다.
꽃나무가 한 민족의 이름으로 이처럼 가혹한 시련과 수난을 겪은 사례는 없었다. 애국지사 남궁 억 선생님은 무궁화 묘목을 전국적으로 보급해오다가 형무소에 투옥되었고 동아일보 제호의 무궁화 도안도 삭제되었다. 1950년대부터 서울대학 농과대학 화훼연구실에서 학문적인 연구와 육종, 세계적인 원예품종의 도입과 일반재배법의 개발 등이 시작되었다. 산림청 임목육종연구소와 농진청 원예연구소에서 무궁화 육종에 착수하였고, 1972년 역사상 처음으로 약 100품종의 무궁화를 전시하였다.